공지사항
2021년도 1학기 학부 인문 아너스 프로그램 참여자 후기
* 이 글은 2021년 가을에 발행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교 소식지 제53호에 실려 있습니다.
1. 이주노동자의 회원자격: 국가의 ‘제외할 권리’와 구성원의 선발 기준을 중심으로 - 철학과 이지혜
새내기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께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해 주신 내용이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처하며 자꾸만 대화 상대방(interlocutor)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곧잘 대답하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계속되면 명백히 틀린 대답을 하거나, 대답할 말을 잃고 지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메논은 소크라테스를 상대방의 “영혼도 입도 마비(『메논』, 80b)”시키는 “전기가오리(『메논』, 80a)”에 비유하며 그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메논과 “함께 고찰하고 탐구하길(『메논』, 80d)” 바라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산파처럼, 소크라테스도 상대방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힘들게 낳은 자식 같은 논문!’이라는 농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셨지만, 산파술 이야기는 은연중에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산파술에 의해 논파당한 사람들의 입장에 저를 잠시 세워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대학에서 열리는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은 수업에서 다루는 분야 또는 주제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경험에 조금은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배운 내용을 깔끔히 정리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더하여 글을 엮어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이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글이 향해야 할 방향을 제한해 주는 최소한의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은 글 쓰는 이가 쉬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반면, 아너스 프로그램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글을 쓸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어떤 선행 연구 자료를 참조하여 공부해야 할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길이의 글을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할지 등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 자신이 모든 단계를 기획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주제,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주제를 골라 호기롭게 연구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생각들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꾸만 두리뭉실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고, 읽어보면 좋을 듯한 문헌은 많은데 그중에서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을 솎아내기 어려워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의기양양하게 대화에 참여했다가, 어리벙벙한 반쪽짜리 대답만 내놓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산파술(문답법)을 펼칠 때, 소크라테스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화에 참여하는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전기가오리’의 역할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방이 더 나은 인식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입니다. 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초대한 것이 저라면, 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소개해 준 것은 중요한 문헌들을 추천해 주시고 난삽하게 길을 잃지 않도록 소중한 고견을 나누어주신 김현섭 지도 교수님, 그리고 그 문헌들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학자들일 것입니다.
산파술이 제게 인상 깊게 남았던 이유는 그 목표가 사람들을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해 실제로도 잘 아는 상태’로 이끄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정답이 무엇이라고 직접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산파는 산파일 뿐, 산모의 아이를 대신 낳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당하고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자신이 실은 잘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괴롭게, 괴롭게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고 살던 때보다 인식적으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른 동시에, 스스로의 (무지한) 처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됩니다.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힘으로 연구를 진행해보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종 원고를 탈고하고 난 뒤, 군데군데 빈 곳이 많더라도 내 손으로 ‘내 글’을 써보았다는 아주 자그마한 자부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이후 진행된 심포지엄은 준비한 원고를 다른 참가 학우들과 나누고, 프로그램 지도 교수님들의 고견을 들을 수 있었던 감사한 경험인 동시에, 한 학기 동안 진행한 연구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 연구주제를 골랐는지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면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경험에 대해 일관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으며, 제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를 정말로 알게 되었으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기꺼이 탐구하려고(『메논』, 84b)” 할 때입니다.
2. 바틀비 앞에서 : 호모 사케르로서의 『필경사 바틀비』 (Before Bartleby: Bartleby the Scrivener as Homo Sacer) - 영어영문학과 조하연
아너스 프로그램 공지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삶과 인문학’ 조교를 맡고 있었고 공지는 신입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지를 보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앞서서 결국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2021년 봄, 학부생으로서 마지막 학기를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을 생각하다가 인문대학 아너스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긴장되는 마음이 컸지만 솔직한 태도로 지원한 끝에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졸업논문 작성이 아닌 다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보통 종강하고 나면 다시 돌아보기 힘들었던 수업의 결과물과 끝까지 씨름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과제로 영어영문학과에서 가장 어려운 수업 중 하나인 ‘비평이론’ 수업의 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처음 접하고 매우 난해해서 놀랐던, 영문학계 비평에서 ‘산업’이라 일컬어질 만큼 비평 대량 생산의 주역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또한 작품을 이해할 비평으로 조르지오 아감벤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공부했습니다. 아감벤은 ‘법’이라는 틀을 이용해 이를 벗어난 자에게 시스템을 파괴할 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법을 벗어난 존재들이란, 권력을 가진 주권자와 모든 법에서 소외된, 이를테면 난민과도 같은 ‘호모 사케르’들이라고 합니다. 아감벤은 바틀비라는 인물 역시 이런 특성으로 고용주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는, 시스템에 반하는 위치를 점했다고 평가합니다. ‘비평이론’ 수업에서는 바틀비가 서술자의 텍스트에 갇혀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저는 결국 바틀비가 서술자의 사무실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 주목해 바틀비가 시스템 외부에 존재했더라도 그것은 고용주의 틀일 뿐, 사회 전체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아감벤의 논의에 반박하는 내용의 과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수업과 성적에서 벗어난 끈기를 시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관심사와 인문학적 고민을 가진 동료들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제가 답하고자 했던 질문, 제 과제의 목적, 논리의 흐름을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학우들과 논평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제 글에도 적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사려 깊은 평가와 조언은 제가 글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인문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성도 있는 논문을 작성하는 법, 또 인문학자로서 학문에 기여하기 위해 비판을 넘어선 해결 방식과 대안을 모색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저에게 인문대 아너스 프로그램은 더욱 심도 있게 학문을 공부하기 위한 자세와 관점을 갖출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또한 저의 생각과 글에 대한 애정과 끈기를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교육지원센터, 아낌없는 조언을 나눠주신 모든 교수님들, 그리고 학우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 이주노동자의 회원자격: 국가의 ‘제외할 권리’와 구성원의 선발 기준을 중심으로 - 철학과 이지혜
새내기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께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해 주신 내용이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처하며 자꾸만 대화 상대방(interlocutor)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곧잘 대답하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계속되면 명백히 틀린 대답을 하거나, 대답할 말을 잃고 지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메논은 소크라테스를 상대방의 “영혼도 입도 마비(『메논』, 80b)”시키는 “전기가오리(『메논』, 80a)”에 비유하며 그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메논과 “함께 고찰하고 탐구하길(『메논』, 80d)” 바라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산파처럼, 소크라테스도 상대방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힘들게 낳은 자식 같은 논문!’이라는 농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셨지만, 산파술 이야기는 은연중에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산파술에 의해 논파당한 사람들의 입장에 저를 잠시 세워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대학에서 열리는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은 수업에서 다루는 분야 또는 주제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경험에 조금은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배운 내용을 깔끔히 정리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더하여 글을 엮어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이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글이 향해야 할 방향을 제한해 주는 최소한의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은 글 쓰는 이가 쉬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반면, 아너스 프로그램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글을 쓸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어떤 선행 연구 자료를 참조하여 공부해야 할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길이의 글을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할지 등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 자신이 모든 단계를 기획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주제,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주제를 골라 호기롭게 연구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생각들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꾸만 두리뭉실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고, 읽어보면 좋을 듯한 문헌은 많은데 그중에서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을 솎아내기 어려워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의기양양하게 대화에 참여했다가, 어리벙벙한 반쪽짜리 대답만 내놓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산파술(문답법)을 펼칠 때, 소크라테스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화에 참여하는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전기가오리’의 역할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방이 더 나은 인식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입니다. 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초대한 것이 저라면, 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소개해 준 것은 중요한 문헌들을 추천해 주시고 난삽하게 길을 잃지 않도록 소중한 고견을 나누어주신 김현섭 지도 교수님, 그리고 그 문헌들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학자들일 것입니다.
산파술이 제게 인상 깊게 남았던 이유는 그 목표가 사람들을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해 실제로도 잘 아는 상태’로 이끄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정답이 무엇이라고 직접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산파는 산파일 뿐, 산모의 아이를 대신 낳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당하고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자신이 실은 잘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괴롭게, 괴롭게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고 살던 때보다 인식적으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른 동시에, 스스로의 (무지한) 처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됩니다.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힘으로 연구를 진행해보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종 원고를 탈고하고 난 뒤, 군데군데 빈 곳이 많더라도 내 손으로 ‘내 글’을 써보았다는 아주 자그마한 자부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이후 진행된 심포지엄은 준비한 원고를 다른 참가 학우들과 나누고, 프로그램 지도 교수님들의 고견을 들을 수 있었던 감사한 경험인 동시에, 한 학기 동안 진행한 연구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 연구주제를 골랐는지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면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경험에 대해 일관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으며, 제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를 정말로 알게 되었으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기꺼이 탐구하려고(『메논』, 84b)” 할 때입니다.
2. 바틀비 앞에서 : 호모 사케르로서의 『필경사 바틀비』 (Before Bartleby: Bartleby the Scrivener as Homo Sacer) - 영어영문학과 조하연
아너스 프로그램 공지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삶과 인문학’ 조교를 맡고 있었고 공지는 신입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지를 보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앞서서 결국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2021년 봄, 학부생으로서 마지막 학기를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을 생각하다가 인문대학 아너스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긴장되는 마음이 컸지만 솔직한 태도로 지원한 끝에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졸업논문 작성이 아닌 다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보통 종강하고 나면 다시 돌아보기 힘들었던 수업의 결과물과 끝까지 씨름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과제로 영어영문학과에서 가장 어려운 수업 중 하나인 ‘비평이론’ 수업의 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처음 접하고 매우 난해해서 놀랐던, 영문학계 비평에서 ‘산업’이라 일컬어질 만큼 비평 대량 생산의 주역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또한 작품을 이해할 비평으로 조르지오 아감벤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공부했습니다. 아감벤은 ‘법’이라는 틀을 이용해 이를 벗어난 자에게 시스템을 파괴할 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법을 벗어난 존재들이란, 권력을 가진 주권자와 모든 법에서 소외된, 이를테면 난민과도 같은 ‘호모 사케르’들이라고 합니다. 아감벤은 바틀비라는 인물 역시 이런 특성으로 고용주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는, 시스템에 반하는 위치를 점했다고 평가합니다. ‘비평이론’ 수업에서는 바틀비가 서술자의 텍스트에 갇혀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저는 결국 바틀비가 서술자의 사무실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 주목해 바틀비가 시스템 외부에 존재했더라도 그것은 고용주의 틀일 뿐, 사회 전체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아감벤의 논의에 반박하는 내용의 과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수업과 성적에서 벗어난 끈기를 시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관심사와 인문학적 고민을 가진 동료들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제가 답하고자 했던 질문, 제 과제의 목적, 논리의 흐름을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학우들과 논평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제 글에도 적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사려 깊은 평가와 조언은 제가 글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인문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성도 있는 논문을 작성하는 법, 또 인문학자로서 학문에 기여하기 위해 비판을 넘어선 해결 방식과 대안을 모색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저에게 인문대 아너스 프로그램은 더욱 심도 있게 학문을 공부하기 위한 자세와 관점을 갖출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또한 저의 생각과 글에 대한 애정과 끈기를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교육지원센터, 아낌없는 조언을 나눠주신 모든 교수님들, 그리고 학우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